넌 무슨 생각으로 프로그래밍하니?

프로그래머의 소명 의식

전베버 교수님

나는 대학교에서 PR을 전공했다. 난 전공에 굉장히 불성실한 학생이었고, 내 성적표에서 C 학점 이하는 모두 전공 수업이 지분을 가지고 있다. 위기관리 대응 매뉴얼과 전략적 스테이크 홀더의 종류를 암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당시의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고, 성장 없이 스스로 자위하는 조별 과제에 지쳐있었다.

전공 수업과 대조적으로 타과 수업은 성적이 좋아 묘한 대칭을 이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사회학과의 ‘정치와 사회’라는 수업이었다. 교수님은 40여 년간 막스 베버만을 연구해 세계적인 석학이 되신 분이었고, 학생들은 모두 그를 본명 대신 ‘전베버’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교수님은 복잡한 서양 철학과 역사, 그리고 악명높은 막스 베버의 텍스트를 학생들에게 아주 쉽게(!) 설명해주는 엄청난 내공이 있었다.


소명의식과 자존감

교수님께서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직업으로서의 학문 등 막스 베버가 남긴 명저들을 조금씩 소개해주셨는데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은 ‘소명 의식’의 역사였다. 막스 베버는 근대에서 부르는 직업적인 소명 의식이 기독교적 가치관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한다. 전통적인 서구 사회에서 직업이란 루터가 말한 것처럼 ‘하느님이 나에게 내려주는 천명’이었다.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나 할까. 합리주의의 등장과 더불어 절대적인 카리스마는 사라지고 청교도적인 윤리 의식이 남는데 이것이 ‘직업으로서의 소명 의식’으로 발현된다.

절대적인 카리스마가 사라진 시점에서 스스로 삶의 이유를 찾고 그것을 윤리적으로 행하는 것. 이것이 ‘소명 의식’의 출발인데 이를 통해 인류는 역사상 최초로 스스로의 삶의 이유를 자신이 정하게 된다. 이를 다른 말로 ‘자존’이라고 한다. 자존감과 자신감은 꽤 많이 혼동되어 쓰는 말이지만, 자존감이 높다라는 말은 결국 ‘자신이 사는 이유를 스스로 잘 알고 행동하고 있다’라는 말과 동일하다. 직업인으로서 스스로 설정하고 따르는 소명 의식은 단지 직업 만족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만족도와도 연결이 되는 것이다.


생존 없는 자존이란

카피라이터로서 나의 소명 의식은 ‘활인’이었다. 사람과 시장 모두를 살리는 광고를 만드는 것이 나의 꿈이자 목표였다. 모든 제품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일련의 보편적인 가치에서 탄생하고, 그러한 가치를 충족시키는 고유한 해석과 방법이 브랜드가 된다. 브랜드는 그 자체로 실체가 없지만, 동시에 제품이라는 실체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브랜드라는 길 위에서 소비자 내면의 카타르시스를 충족시킬 크리에이티브를 제공하는 것. 그리고 그 카타르시스가 제품 이미지와 기대로 이어지고, 제품은 그 기대에 훌륭히 부응하는 선순환이 내가 원하는 ‘완벽한 그림’이었고, 또한 내가 광고를 하는 이유이자 소명이었다.

애석하게도 내 재주는 그 소명에 미치지 못했다. 시장은 늘 키치하고 트렌디한 어떤 것을 요구했고, 그것을 ‘신속하게’ 생산해야 하는 크리에이터로서 나는 빵점이었다. 회의 1시간 전, 깜빡이는 커서와 하얀 종이를 바라보며 ‘내가 못하는 어떤 종류’의 것을 신속하게 생산해내야 하는 압박감은 늘 스트레스였다. 무엇보다 내가 스스로 준비되지 않았다고 느꼈을때도 어쩔 수 없이 남과 날 속여가며 내 아이디어를 팔아야 하는 것을 난 견딜 수가 없었다. 시간은 늘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 덕에 항상 불안했다.

그 즈음에 퇴근길에서 교수님의 수업이 자주 떠올랐다. 교수님께서는 인간의 3대 욕구가 생존, 자존, 공존이라 했는데 난 직업인으로서 생존할 최소한의 자격이 없는 지도 몰랐다. 생존 없는 자존, 자존 없는 공존. 그 무렵은 친구들과의 술자리도 썩 즐겁지는 않았다.


프로그래머의 소명 의식

돌고 돌아 코드스쿼드에 있는 지금, 프로그래머의 소명 의식은 무엇인지 다시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내가 프로그래밍을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O(NlogN)을 O(logN)으로 바꾸는 쾌감으로는 그것을 설명할 수 없다. 절대적인 정언 명령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아마 그 길은 내가 평생 찾아야 하는 길일터다.

어쩌면 그 길을 찾을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생존, 자존, 공존의 스텝을 세월의 흐름에 따라 하나씩 밟다보면 그 길이 바로 나의 소명의식이 되는게 아닐까. 지금은 프로그래머로서의 생존을 위해 최소한의 지식을 갖추는 것이 나를 움직이게 하는 가장 큰 힘이다. 하나씩 스텝을 밟아 나가며 프로그래밍 생태계와 후배들을 위한 공존의 스텝까지 갈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사실, 이 모든 과정이 재밌으니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Date: May 26, 2019
 Tags:  essay

Previous:
⏪ [Algorithm] Insertion Sort

Next:
음악으로 배우는 페어 프로그래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