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불 앞에 서 있는 나와 너에게

자신의 파랑불을 기다리며

빨간불 앞에 서 있는 나와 너에게

신호등의 신은 우릴 버렸는가!

내가 횡단보도를 건널 때면 항상 신호등이 바로 바뀌는 법이 없다. 늘 깜빡이는 파랑불에 헐레벌떡 뛰어야 하거나 빨간불 앞에서 지난한 시간을 보내야 한다. 사람의 마음이란 간사한 법이라 바로 앞에서 파랑불이 켜진 일은 난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심지어 신호등의 신이 날 버렸다는 쓸데없는 믿음까지 생길 지경이다.

파랑 신호등에 건너기 위해 걸음을 서두르는 모습이 마치 우리 인생 같아 서글퍼진다면 지나친 생각일까. 나, 그리고 너는 지금까지 인생이라는 신호등 앞에서 파랑불에 여유롭게 손을 들며 건넌 적이 얼마나 될까. 늘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며 조급해하고, 가끔은 무단횡단을 하다 사고가 나기도 하는 모습이 우리네 보통 사람일 것이다.

다행인 것은 바뀌지 않을 것 같던 빨간불도 기다리다 보면 파랑불로 언젠가는 바뀐다는 사실이다. 기다림의 시간이 각자 다를 뿐, 언젠가는 파랑불로 바뀐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노력하며 기다리는 일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다.

그러니 기다리는 시간이 좀 더 행복했으면 좋겠다. 파랑불에 횡단보도를 건너는 찰나의 시간에 누리는 행복보다 빨간불 앞에서 꿈꾸며 기다리는 시간이 우리 인생의 대부분이니까. 이 생각을 크라이치즈버거를 먹으러 가는 횡단보도 위에서 생각하다니. 깜빡이는 신호등에 위태롭게 건넌 후 가게에 도착해 먹는 햄버거는 정말 맛있었다.


새벽 신호등은 외롭다

맛있게 햄버거를 먹고 밤코를 한 후 지금 새벽에 집에 돌아와 카피라이터로 입사 지원했을 때의 포트폴리오를 뒤적거려봤다. 당시 나의 수련 방법은 가상의 광고주를 설정하고 하루에 3개씩 꾸준히 카피를 쓰는 것이었다. 습작이 쌓여 꽤 양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애착이 가는 녀석이 있기 마련!

내가 가장 아끼는 내 작품은 신호등을 소재로 쓴 카피다. 기가 막히게 잘 써서가 아니라, 그동안 쓴 카피 중 가장 솔직하게 쓴 카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카피를 쓴 날은 조금 특별하다. 이날은 정말 가고 싶던 광고회사의 최종 면접 탈락 통보가 있던 날이었다. 면접에서 떨어진 날 채용 광고 카피를 쓰다니… 동물보호협회가 회식 장소로 보신탕집을 잡은 것만큼이나 이상한 일이긴 하다.

인크루트 : 신호등편

이날 새벽, 난 슬리퍼를 신고 나와 정처 없이 터벅터벅 길을 걸었다. 부모님께 어떻게 이 비극을 잘 포장해 설명해 드려야 할지, 다음 스텝은 어디를 밟아야 할지, 내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이 뒤엉켰고 시커먼 새벽하늘이 내 인생 같아 막막했다.

그때 저 멀리 횡단보도가 보이고 파랑불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우습게도 난 갑자기 서러워져서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될 듯 될 듯 결국 안되는 내 모습이 파랑불을 눈앞에 두고 횡단보도를 건너지 못하는 것과 꼭 같아 보여서 서러웠다.

그렇게 한참을 우두커니 횡단보도를 보고 있었다. 차가 없는 새벽이라 사람들은 서슴없이 무단횡단을 했고, 난 그 모습을 보며 취업이라는 횡단보도에서 무단 횡단을 할 수 있는 능력도 배짱도 없는 내가 미워졌다. 노력은 결과를 담보하지 않는 부도수표였고, 그 허술한 종잇장에 성과를 기대하는 내가 우스웠다.


영원한 빨간불은 없다

속상한 마음을 뒤로하고 나는 집에 가기 위해 횡단보도로 발걸음을 옮겼다. 빨간불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다 파랑불로 바뀌는 찰나, 난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내가 언제 어느 때에 횡단보도에 도착하더라도 파랑불은 반드시 켜진다는 것을.

내가 느리게 가든, 빨리 가든 파랑불은 늘 나를 기다려줬다. 단지 차례의 문제였을 뿐, 내가 횡단보도에 도착해 기다리기만 한다면 난 횡단보도를 건널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어느새 내 마음은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렇게 집에 와서 펜을 꺼내들고 쓴 습작이 바로 위 하반기 공채 광고의 카피다. ‘늦어서 진심이다’라는 메인 카피는 그 당시의 나에게 하는 위로의 말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 하는 결심의 말이기도 하다. 조용히 노력하며 때를 기다리면 언젠가는 이뤄진다는 강한 믿음, 이것이 날 움직이게 하고 살게 한다.


일단 신호등 앞에 있자

코드 스쿼드에 있는 모든 동료들은 지금 빨간불 앞에 서 있다. 가야 할 목적지는 각자의 가슴 속에 다른 모습으로 있겠지만 그 길을 가기 위해선 개발자라는 횡단보도를 건너야 한다는 점에서 모두 같다. 우리는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지만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할지 누구도 모른다.

누군가의 신호등은 조금 빨리 켜질 것이고, 누군가는 예전의 나처럼 빨간불 앞에서 우두커니 서서 횡단보도를 먼저 건너는 사람을 바라봐야 할 것이다. 서럽고 외로운 시간도 분명히 있을 것이고, 그 모든 시간이 행복하거나 유쾌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기다리는 시간이 길든 느리든 언젠가는 파랑불이 켜진다는 사실은 모두에게 공평하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단 하나, 횡단보도 앞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가 반드시 횡단보도를 건너야 하는 길이라면 그 앞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파랑불을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힘들 때 잠깐 동네 카페에서 친구와 함께 신나게 수다를 떨 수는 있겠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열심히 노트북을 두드리며 파랑불을 기다리겠지. 다시 생각하니 학습도 신호등을 건너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파랑불이 들어오지 않아도 결국 그 앞을 맴돌아야 깨달음의 파랑불에 탑승할 수 있는 것이다. 늦든 빠르든 상관없이 계속 그 앞을 맴돌며 자신의 파랑불을 기다리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날 썼던 카피 하나를 더 소개하며 글을 마친다. 다들 너무 걱정 말자.

우리는 그 동안 헤맸던 길보다 훨씬 멀리 갈 거니까.

인크루트 : 신호등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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